[본문]저는 아동학대 생존자입니다. 궁금한 이야기 주인공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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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저는 아동학대 생존자입니다. 궁금한 이야기 주인공의 고백

by 별다람 2023.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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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인기 게시판이라서 방탈이지만 올립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지난 주 금요일,
어린이날 SBS 궁금한 이야기 Y에
저와 친오빠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유투브에 검색해보시면 영상 보실 수 있습니다.)
방송에는 아주 일부분만 나왔습니다.
방송에 제보했던 제 전체 이야기를 이 공간에 올립니다.

내용이 길지만 꼭 읽어주시고 저와 오빠,
그리고 죽은 둘째 오빠의 한이 풀릴 수 있도록
여론을 움직여 주세요.
기사화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동학대로 인한 사망은 공소시효가 폐지되어야 합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15개월 딸을 키우며 사는 애엄마이며, 1993년생 서른 한 살, 겉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주 심각한 아동학대 피해자였고, 현재도 그때의 시간에 갇혀 피해자로 살아가는 중입니다. 증거가 없고, 공소시효가 지났다는(아동학대 공소시효는 아동이 성인이 된 후 7년까지라고 합니다. 제가 스물 일곱살이 되면서 그들의 죄는 공소시효가 끝난 거지요.) 이유로 마음 속에만 묻어두고 살다가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이렇게 글로 호소 드려봅니다.

그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지옥같은 학대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지 사연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목사 가정에서 2남 1녀로 태어난 막내딸입니다. 위로 4살, 3살 차이 오빠 둘이 있었지요.
춘천 00 교회 부목사로 안정적으로 살고 있던 친부가 당시 교회 성도이자 기혼에 자식이 둘이나 있던 ***집사와 바람이 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친부는 목사라는 신분도 아랑곳 않고 저희 삼남매를 그 여자 아파트에 데리고 다니며 대놓고 바람을 피웠고, 상간녀인 ***집사는 폭력적인 남편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자상한 목사인 저의 친부를 친어머니에게서 빼앗고 맙니다.

결국 저희 친어머니는 교인들의 수군거림 속에 원치 않는 이혼까지 당하고, 생떼같은 자식, 삼 남매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친모에게 양보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서른이 넘은 지금도 매일매일 해보지만, 멀쩡한 목회자 가정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이었는지, 혹시나 애들을 친모에게 주면 면접교섭권을 행사할 친부가 전처를 만나면서 자신들의 관계가 흐트러질까봐서인지, 친모의 경제력이 걱정되었는지 도대체 뭣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저희는 그저 어린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지옥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빠 둘과 저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지역구 강원도에서 계속 목회하기에는 불륜 커플 꼬리표 탓이었을까요? 친부는 이혼 후 상간녀인 계모와 저희 셋을 데리고 충청도 서산 오지 바닷마을 시골교회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13년 남짓 세상 점잖은 목회를 했고, 저는 그들의 불륜 시작 1년, 충청도 시골에서 13년, 그리고 다시 아산에서 3년, 제 인생의 절반도 넘는 세월을 말로 다 표현 못할 학대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부턴 장황하게 쓰기보단 제가 당했던 일들을 열거식으로 하나하나 써보겠습니다. 아래 내용들은 제가 충청남도 서산으로 강제 이주한 1996년인 네 살 무렵부터 그 지옥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2013년 스물 한 살까지 학대 당한 것들을 대부분은 저의 기억이고, 친오빠의 기억, 교회 언니가 말해준 내용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1. 제 몸에서 나온 각종 오물, 더럽다고 생각되는 온갖 오물 다 먹였습니다.

✔️똥 먹이기
- 제 기억으로는 2번입니다.
- 5~7살 무렵, 사택 안으로도 못 들어가고 현관에서 먹고 자고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변이 마려워서 화장실 좀 보내달라고 했더니 계모는 그냥 옷에다 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옷을 벗으라고 하더니 팬티에 묻은 똥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건 다 해야했기에 반항 한 번 못하고 끝까지 다 먹었습니다.
-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계모는 제게 종종 주황색 바가지에 똥을 싸게 했습니다. 그리고 숟가락을 주면서 똥을 퍼서 그 자리에서 먹게 했습니다. 먹다 말게 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다 먹을 때까지 지켜봤습니다.

✔️ 오줌 먹이기
- 통에다 오줌 싸게 해서 다 마시게 했습니다.

✔️ 오빠에게 팬티 구정물 짜서 먹이도록 시킴
- 오빠가 미국에 가기 전 학교를 그만두고 방에 갇혀 지내면서 화장실도 맘대로 못 가게 해서 팬티에 여러 번 실수를 했습니다. 그 팬티를 저한테 손으로 쥐어짜라고 하고, 오빠는 하의를 벗은 채 무릎 꿇고 입을 벌린 채 제가 짜 준 팬티 국물을 받아먹어야 했습니다.

- 저는 이 일이 기억에 없었는데 이 상황을 지켜본 교회 언니는 이 장면이 너무 충격이라 평생을 잊지 못한다고 하며 이야기 해줬습니다. 오빠와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니 기억이 났습니다.

✔️ 상한 음식 먹이고 토하면 그 토 남김 없이 다 먹임
- 현관에서 먹고 자고 했던 시절, 신발 벗는 곳에 토했는데 걷어서 먹으라고 해서 손으로 다 긁어모아 먹어야만 했습니다.

✔️ 상한 음식은 수시로 먹음
-교인들이 가져다주는 먹기 싫은 음식, 오래된 음식, 썩은 냄새나는 음식은 제 차지였습니다. 다 먹는내내 지켜봤습니다.

-방에 갇혀 지낼 때에는 상한 밥 넣어줘서 먹기 싫어서 숨긴 적 있었는데 나중에 찾아내서 결국 곰팡이 핀 밥 아주 여러 번 다 먹어야 했습니다.

-대야에 들어있던 썩어서 물까지 가득 차 있던 썩은 배, 다섯 개 이상 한 자리에서 다 먹게 하고, 배를 싸고 있던 종이까지 다먹게 했습니다.

✔️개밥그릇 핥아먹기
-교회 뒷마당에 개를 여러 마리 키웠는데 개밥그릇 설거지하라고 시키면서 씻기 전에 내 혀로 다 핥아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설거지를 하라고 했습니다.

✔️하수구 거름망 핥아먹기
- 거짓말 같지만, 설거지 시키기 전에 이것부터 핥아먹으라고 시켜서 먹어야만 했습니다.

✔️벌레 주워먹기
- 교회 주변에 쥐며느리라는 벌레가 많았습니다. 교회 마당 풀 뽑기도 제 일이었는데, 그 벌레가 보이면 주워먹게 했습니다. 주일 학교 애들 있는 데서도 @@이는 벌레라면서 주워먹게 했습니다.

✔️마늘 고문
- 마늘철이 되면 교인들이 마늘을 엄청 많이 갖다 주셨습니다. 하루 종일 맨손으로 마늘을 까게 시키면서 아주 여러 번 깐 마늘을 다 먹게 했습니다. 입이 퉁퉁 붓도록 먹으라고 했습니다. 친오빠는 그 트라우마 때문에 아직도 마늘을 입에도 못 댑니다.

✔️고기 비계
- 사람들이 저에게 말랐다는 소리를 할 때마다 비곗 덩어리들을 가져와 삶아서 먹였습니다. 억지로 구역질하면서 먹어야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분명 정육점에서 못 파는, 개사료에나 쓰는 걸 공짜로 얻어와서 먹였던 것 같습니다.

✔️문틀에 있는 먼지
- 문틀에 달라붙은 먼지, 벌레 사체, 머리카락 같은 걸 긁어 먹게 했습니다.

✔️ 더러운 수건 (금지어라서 이렇게...ㅠ) 짠 물
- 더러운 수건을 빨게 한 뒤, 가져가서는 입을 벌리라고 하고는 손수 짜서 그 물을 받아 먹게 했습니다.

2. 신체 고문

✔️ 감금, 포박
- 오빠 기억으로는 36개월 무렵부터 서서히 학대를 시작했는데, 다락에 가둬놓고 화장실도 못 가게 해서 대소변도 바지에 싸게 했습니다. 그래놓고 똥 오줌 쌌다며 때렸습니다. 36개월이면 기저귀 떼고 화장실 가는 거 배우는 월령입니다.

- 좀 더 커서, 여섯 살 이후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는 두 손을 박스테이프로 칭칭 감아놓고 재래식 화장실에 가둬놔서 여러 날 동안 먹고 자게 했습니다.
- 잠깐씩 와 계시던 계모의 친정어머니이신 할머니께서 묶여 있는 제 손 위에 감자를 올려주신 기억이 납니다. 그 감자를 묶인 손으로 허겁지겁 먹은 기억도 납니다.
- 계모는 친정엄마이신 할머님께서도 못 이길 만큼 싸이코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 물 고문
- 매 맞을 때는 수시로 물고문도 같이 당했습니다. 얼굴에 물 계속 퍼붓는 건 기본이고, 머리채 잡고 변기에 얼굴 다 넣고나서 물내림 레버를 내린 적도 많습니다. 머리통이 변기로 다 빨려들어가는 느낌입니다.

-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계모의 친정인 강릉으로 교회 어린이들 십여 명을 데리고 캠프를 갔을 때, 제가 잦은 물고문으로 물을 무서워하는 걸 알면서도 교회 아이들 시켜서 일부러 바닷물에 빠뜨리라고 했습니다. 언니들 둘이서 제 팔다리를 들고 이틀 동안 물놀이 하면서 바닷물에 여러 번 빠뜨렸는데 계모는 왜 저러냐면서 한심하게 쳐다보거나 웃곤 했습니다.

✔️벽에 머리 박기
- 머리채 잡고 머리를 계속 벽에 박았습니다.

✔️따귀
- 코피 터질 때까지, 코피가 터져도 싸대기를 계속 때렸습니다.

✔️구둣발로 맞음
- 구두 신은 발로 배 엄청 걷어찼습니다. 너무 세게 걷어차여서 뒤로 쓰러지면 일어나라고 해서 또 걷어차였습니다. 제가 겪은 고문 중에 이게 제일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배를 걷어차이다보니 나중에 어른 되면 애기도 못 낳겠구나 생각하곤 했습니다.

✔️각목으로 머리 맞음
- 머리에 피가 줄줄 흐를 때까지 각목으로 두들겨 패놓고 마데카솔 가루 뿌려주고 학교 보낸 적도 있습니다. 제 머리에 여러 개 있는 땜빵 전부 다 계모가 휘두른 각목에 맞아서 생긴 것입니다.

✔️햇볕 보고 서 있기
-얼굴이 하얗다는 이유로 고개 완전 젖혀서 뜨거운 태양을 보고 서있게 했습니다. 눈물이 계속 흐르고 눈을 뜰 수 없는데 그렇게 서 있어야 했습니다.

✔️일부러 외모 흉하게 만들기
- 이런 건 제가 겪은 학대 축에도 못 끼지만 기억나니 적어봅니다.

- 저는 어릴 적부터 속눈썹이 길고 풍성했는데 학대를 시작한 36개월 즈음부터 가위로 여러 번 제 속눈썹을 잘랐다고 합니다.

- 머리는 항상 가위로 아무렇게나 잘라줘서 쥐파먹은 것처럼, 관리 안된 남자애들처럼 삐뚤빼뚤한 짧은 컷트였습니다.
- 사춘기인 중학교 때도 미용실을 데려간 적이 없습니다. 

- 교복도 한 15년 전에 졸업한 교인 자녀분 걸 물려 받아서 다 낡은 걸 3년 내내 입고 다녔습니다. 제 키는 작고, 치마가 너무 길어서 발목까지 내려온 걸 너무 챙피해서 접어입은 걸 들킨 날, 머리채 잡고 끌려다니고 싸대기를 맞아야 했습니다.

✔️ 일상적인 폭력
- 이유없이, 정확히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만들어서 사정없이 매맞던게 일상이었습니다.
- 원래는 눈앞에 보이는 도구 아무 거나 들고 매를 때렸는데, 어느 날 이사간다는 집에서 나무 옷걸이를 한아름 얻어왔습니다. 웬만하면 안 부러지는 나무 옷걸이인데 하도 때리고 때려서 결국 몇 달 후에 그 나무 옷걸이들이 죄다 부러졌습니다.
- 친부한테도 때리게 했고 당시 교회에 제일 충성하던, 계모에게 가스라이팅 제대로 당하던 000 권사 시켜서도 자주 때리게 했습니다.
- 친부는 예배시간과 땔감 나무할 때 외에 만날 일이 거의 없었고, 친부가 집에 없을 때 이런 폭력이 더 심해졌습니다.

3. 각종 노동

✔️ 땔감 구해오기
- 당시 교회는 화목 보일러를 가동했는데, 보일러에 들어갈 나무도 제가 상당 부분 구해와야 했습니다. 새벽기도 끝나면 6시쯤 되는데, 끝나자마자 혼자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꺾고, 날라왔습니다. 한겨울 여섯시는 깜깜한데도 산에 올라가서 학교가기 전에 내려와야 했습니다.

✔️개똥 맨손으로 치우게 하기
- 교회 마당에서 키우던 개가 방금 싼 김이 모락모락나는 똥도 맨손으로 주워서 치우라고 했습니다.

✔️ 노동 착취 및 방임
-시골 교회 사택에서 빨래, 밥짓기, 설거지, 청소, 이복동생 천기저귀 손 빨래 같은 집안 살림 및 교회 예배당 청소, 마당 풀뽑기, 돌 골라내기 등등 일하는 건 그냥 제 일상이었습니다.

- 000 권사네 보내져서 자주 일했습니다.
한 번은 그 집 논에서 하루 종일 낫으로 풀 베고 빵이랑 우유 갖다준 거 먹고 근처 빈 집에 들어가서 자고. 아침에 다시 나와서 일하는 걸 며칠 반복했습니다. 그랬더니 옆 논주인이 보고 동네에 소문나서 한바탕 난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염소 집에 들어가기
- 교회 마당에서 흑염소를 한 마리 키웠는데, 염소집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이건 000 권사가 시킨 것입니다. 이 사람은 계모만큼 싸이코는 아니라서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기억에 남습니다.


4. 살인

- 1999년 여름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삼남매가 남매가 된 날입니다.
- 친부와 계모는 둘째 오빠를 죽음에 이르도록 학대했습니다.
- 당시 저는 일곱 살이어서 어렴풋한 기억만 있습니다. 둘째 오빠가 죽던 순간, 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깜깜하고 꽉 막힌 나무 상자 같은 곳에 갇혀있어서 소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 가정통신문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오빠를 친부와 계모 둘이서 하루 종일 사정없이 때렸다고 했습니다. 종일 물도 못 마시게 하고, 굶긴 상태에서 배고프다고 하니, 계모의 친정어머니이신 할머니께서 저희들 방으로 자두를 몇 개 넣어 주셨다고 합니다.

- 배가 너무 고팠던 오빠들은 자두를 허겁지겁 먹었고, 그 후로 둘째 오빠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끙끙거렸다고 합니다. 첫째 오빠는 밖에서 걸어 잠긴 문을 두드리면서 애가 이상하다고 애 좀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 하루 종일 때린지라 둘째 오빠는 온몸이 멍투성이였고, 이대로 데려가면 의심받을 게 분명하니, 병원을 데려가지 않기로 하고, 그 와중에 뜸을 떴다고 합니다. (당시 친부와 계모는 침, 부항, 뜸 같은 한방 요법에 꽂혀있었다더군요. 숨이 넘어가는 아이에게 뜸이라니요?) 결국 둘째오빠는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습니다.

- 당시엔 의사에게 사망선고 받는 것, 그 이후 화장 치르는 것이 요즘보다 훨씬 쉬웠다고 합니다. 지금이었다면 뉴스에 매일 오르내리고 감옥에 갔겠지요. 오빠가 죽은 뒤에야 사망선고 받으러 병원을 데려갔고 교회에서 장례 예배 잠깐 드린 후 바로 화장을 했다고 합니다.

- 여기서 끝이 아니고, 장례 예배 때 들어온 부조금 백 만원이 없어졌다면서 저랑 첫째 오빠한테 뒤집어 씌우고 자백(?)이란 걸 할 때까지 엄청 두들겨 팼습니다. 돈 찾아오라며 장대비 속에 오빠를 우산도 없이 쫓아냈다고 합니다.

- 지금 생각해보니 계모가 빼돌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곱 살, 열두 살... 오빠와 동생을 잃은 아이들이 백만 원을 훔칠 생각이나 했을까요? 저렇게 두들겨 패고 각종 고문을 다 당하며 사는데 백만 원을 빼돌린다고요? 우리는 그때 천원 한 장 주머니에 용돈으로 받은 적이 없습니다.

5. 정서 학대 및 각종 모함

✔️ 도둑년 거짓말쟁이
- 단 한 번도 돈을 훔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어질 때마다(진짜로 없어진 건지도 지금 생각해보니 의아합니다.) 우리를 의심했고 안 훔쳤다고 하면 훔쳤다고 말할 때까지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러다 너무 아파서 훔쳤다고 하면 또 거짓말쟁이가 되어서 더 맞았습니다.

✔️친오빠랑 성관계?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이면 이런 모함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학대 당하고 사느라 생존에 급급해서 그런 쪽은 전혀 관심도 없던 오빠와 아무 것도 모르는 일곱 살짜리 저를 엮어서 근친 상간 하는 관계라고 지어냈습니다.

- 전혀 그런 적이 없지만 하필 그들이 불륜을 저지르고 서산으로 이주한 4살때부터 친오빠랑 성관계를 했던 아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도 우리 입으로 했다고 할 때까지 말 그대로 쳐맞았습니다.

- 그러고도 모자라 오빠랑 제게 니들 했던대로 해보라며 발가벗겨 놓고 성관계를 시켰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었던 저희는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서 우물쭈물 하고 있었고, 계모가 오빠에게 @@이한테 올라타라고 해서 등을 제 얼굴 쪽으로 하고 배 위에 앉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 또한 제게는 손가락으로 생식기에 손을 넣어보라고 해서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서 요도 쪽으로 손가락을 갖다댔더니 손가락 4개 넣을 때까지 이 짓을 시켰습니다. 저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성관계 및 출산을 위한 '질'이 따로 있다는 걸 알았을 정도로 무지했는데, 계모는 아직 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에게 이런 짓을 시켜놓고 근친상간을 하네, 자위를 하네 하며 모함을 했습니다.

- 아울러 성기로 나쁜 짓을 저질렀으니 벌을 줘야 한다며 생식기 부분만 집중적으로 맞은 적도 많습니다. 000 권사를 시켜서 차 안에 눕혀놓고 다리를 벌리라 한 다음 몽둥이로 생식기 부분만 맞기도 했습니다. 계모도 같은 학대를 여러 번 했습니다. 생식기 대음순 부분이 시뻘겋게 주먹 크기로 부어오른 적도 여러 번입니다.

✔️일기장에 다 기록하게 하기
- 도둑질, 거짓말, 성관계 불러주는대로 쓰라고 해서 협박하고, 여기저기 다 보여주고 다녔습니다. 너희가 나중에 커서 결혼할 사람 데려오면 얘네가 이런 쓰레기들인데 결혼하겠냐며 보여준다고 협박하는 것도 모자라 당시 교회 교인들은 물론 서산지방 목회자 및 사모님들께 보여주고 다녔습니다.

- 이걸 진짜로 믿던 목사님, 사모님들이 계시더라고요. 계모의 현란한 말솜씨에 넘어간 것 같은데, 어른이 되어보니 진짜라고 믿는 당시의 그 어른들이 더 원망스럽습니다. 저희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건 알음알음으로 소문이 다 났을텐데, 이 여자가 남의 자식들한테 왜 이러고 다니나 왜 한 번 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일까요? 초등학생 애들이 정말 근친상간이라는 걸 했다면 정신과든 상담센터든 데려가야 정상 아닙니까? 근데 자백 일기장을 떠벌리고 다닌다고요? 그걸 또 어리석게 믿었던 어른들 아니 정확히 목사님, 사모님들....기도라는 것은 했던 분들일까요?

✔️친엄마 전화
-친엄마가 학교로 전화 왔었냐고 몇 번 받았냐고 물으면서 죽도록 팼습니다. 저는 친엄마 전화를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세 살 때 헤어져야 했기에 친엄마 얼굴도 모룰 뿐더러 목소리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니라고 하자 왜 거짓말 치냐면서 더 죽도록 괴롭혔습니다. 학교까지 쫓아가서 왜 전화를 바꿔주냐면서 선생님들까지 힘들게 했습니다.
- 계모의 이런 횡포 때문에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몇 개월을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학교 선생님들은 매일 매일 찾아오는 그 여자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고통의 시간을 보내셔야 했습니다.

✔️성추행 당했다고 하라고 협박
- 이것도 제정신인 사람이 꾸며낼 수 있는 일인가 싶습니다.
- 어느 날 다짜고짜 묻더라고요. 우체부 아저씨가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네 몸 여기저기 이렇게 이렇게 만졌냐. 아니라고 하니까 맞다고 할 때까지 추긍했고, 저는 또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아무 죄 없는 우체부 아저씨는 몹쓸 인간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런 일을 당하면, 신고를 하지 않나요? 얘가 이런 일을 당했다더라 여기저기 소문만 내고 끝내는 건 도대체 무슨 심리인 건가요?

-교인중 남자 한 분께도 그렇게 당했냐고 또 몰아세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000 권사네서 일하고 있는 중에 아내인 권사가 내 앞에서 남편한테 정말 그랬냐고 물었고 아니라고 답하자 그냥 그렇게 끝났습니다.

- 왜 우리 남편 모함하냐고 묻지 않으셨을까요? 왜 사모는 자꾸 남편 전처의 자식들을 상대로 성적인 소문을 내고 다니나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 아울러 동네 아저씨들도 드나들며 그 어렸던 저랑 성관계를 한다며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교회에 모르는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며 @@이랑 관계하려고 온 동네 누구누구다...이런 소문을 내고 다녔다고 합니다.

✔️ 친모를 쓰레기 취급
- "목사님은 호세아 선지자 같은 사람이다. 니 애미가 친오빠랑 붙어먹고 낳은 게 첫째이고, 그걸 알고서도 결혼하고 품었는데, 둘째도 밖에서 바람 피워서 낳아왔고, 막내인 너까지 술집에서 만들어온 애다. 그러니 너는 목사님을 아빠라 부르지 마라. 나도 엄마 아니고 사모님이다." 라며 저희 존재 자체를 부정했고, 친모를 모욕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르게 했고, 목사님이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 그런데 신기한 건, 첫째 오빠는 친부를 너무나 똑닮은 판박이입니다. 누가 봐도 ○○○ 목사 아들이죠. 저도 친부를 많이 닮았습니다.

6. 언어 폭력
"니 애비는 아프리카 사람이고 니 애미는 다방여자다"
"병신"
"미친 년"
"마귀 새끼"
"귀신은 뭐하나 몰라, 너 같은 년 안 데려가고"
"너는 이 집 식모다"
- 입버릇 처럼 귀에 못이 박히게 했던 말들입니다.

- 재활용 깡통 돌로 쳐서 납작하게 만드는 것도 제 일이었는데, "그거 팔아서 니 에미한테 가라" 했습니다.

- 한 번은 육상대회에 나갔다는 이유로 머리채 잡고 "니 애미가 육상하다 배불렀는데 닮고 싶냐" 라는 소리를 들으며 끌려 다닌 적도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친어머니는 이런 적이 없습니다.

+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 할머니들끼리 교인으로 만나셔서 중매로 결혼하셨다는 친부와 저의 어머니는 친부의 외도로 결혼 생활이 끝이 났고, 둘 사이의 자식 셋은 그 후로 지옥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둘째오빠는 학대를 못 이겨 죽기까지 했습니다.

- 첫째 오빠는 둘째 오빠가 죽고 나서 그 이듬 해에 둘 사이에 친딸이 태어나자 미국에 사시는 큰 아빠의 양자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큰 아빠께 친아들이 태어나자 곧바로 파양되어 14살에 다시 한국으로 보내졌고, 1년 반을 빛도 안 들어오는 작은 방에서 감금되어 머리도 못 자르고,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여전히 미국에 가 있는, 여기에는 없는 사람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 더 이상 감금 시키기 어려워지자 친오빠는 친부의 지인이 운영하는 공장 같은 곳에 버려져서 교회 유아실, 길거리 벤치, 사우나를 전전하며 정말 하루하루 그야말로 개고생을 하면서도 검정고시로 초,중,고 졸업장을 다 땄습니다. 현재는 좋은 아내를 만나 아이 셋 낳고 성실한 아빠로 살아가고 있지만, 과거의 기억에 여전히 힘들고 그 시간들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고 합니다.

- 저는 삼 남매 중 제일 오랜 세월, 17년을 그 지옥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버려진 친오빠가 어찌 어찌 친모를 찾아내서 제발 동생 좀 지옥에서 꺼내달라고 부탁하고, 친모의 도움으로 그 어떤 첩보 작전보다 더 치밀하게 계획해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 탈출 후 곧바로 그들을 고소하려 했으나, 친부의 사과는 없지만 자신의 목회만을 걱정하는 간곡한 부탁 및 당시는 아직 어렸던 배다른 동생도 염려되어 고소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 저는 그 후 지금까지 10년의 시간 동안 생업에 매달려 사느라, 결혼하고 임신, 출산, 육아하느라 정신 없었지만 단 하루도 학대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고 잠들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예쁜 짓이 늘어가는 딸을 보니 인간이란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이거늘, 어릴 적의 저와 오빠들은 왜 그렇게 아파야 했을까요? 길거리에서 지나치는 네살, 다섯 살, 여섯 살, 초등학생, 중학생 무렵의 아이들을 보면 저렇게 맑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며, 누군가의 말처럼 꽃으로도 때릴 수 없는 약하디 약한 아이인데, 계모는 어떻게 그렇게 저를 무자비하게 학대했을까요?

- 자식도 이미 둘이나 낳았고, 서산에 와서도 늦둥이 딸까지 얻었는데, 어미가 되어봤는데도 그랬으니 저는 계모의 눈에 인간이 아니었던 걸까요? 단순히 전처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학대할 수 있나 싶습니다. 양의 탈을 쓰고 버젓이 목회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의 소식을 들으니 울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습니다.

- 구구절절한 제 생존 이야기를 시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적은 것들은 모두 제가 당하고 겪은 일들임에 틀림 없습니다. 제 생명도 걸 수 있고, 제 생명보다 더 소중한 제 딸아이의 모든 것을 걸 수도 있습니다. 모든 내용이 진실임을 다시 한 번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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